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안함 피격 사건 (문단 편집) == 구조 및 인양 과정과 그 전개 == 천안함이 피격되고 함장인 [[최원일]] 중령은 함장실에 갇혔다.[* 충격으로 여러 격실의 해치가 뒤틀려 열리지 않아 이후 구출조들도 해치를 부숴가며 수색해야 했다.] 이 상황에서 부장 김덕원 소령, 작전관 박연수 대위 등 부하 장교들이 함장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최원일 함장을 구출했다.[* 함장이 혼자 살려고 먼저 탈출했다는 허튼 소리가 나오기도 하는데 부하들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큰일이 생겼을 때 함장이 보이지 않으면 그들은 구출 1순위로 함장을 먼저 찾게 마련이다.] 함장실을 빠져나온 함장은 남은 승조원들을 이용해 구출조를 편성해 침몰하지 않고 떠 있던 함수 여러 곳을 수색해 함수에 남아 있던 승조원 59명 중 1명[* 보수부사관 박성균 하사로, 수색 당시 침수된 구획에 있어서 발견하지 못해 인양 후 수습됐다.]을 제외한 58명을 구출한 후 함 외로 올라와 구조를 기다렸다. 이후 도착한 해경 경비정에 차례로 승함, 함장이 마지막으로 퇴함하면서 이때까지 살아 남아있던 승조원 전원이 구조되었다. 피격당한 부위의 특성 상 장교는 전원 구조되었다. 침몰된 함수는 주로 병과 부사관이 생활하는 곳이었으며 장교가 생활하는 곳은 함장실의 해치가 찌그러진 것을 제외하면 비교적 멀쩡했다. 국방부는 사건 당일부터 실종된 함미(배의 뒷부분)의 위치를 찾기 위해 수색을 펼쳤다, 하지만 그 시도가 실패하여 해경과 지역 어선단의 도움을 요청했고 해경은 사건 다음 날인 27일 소나를 이용, 함미로 추정되는 물체를 식별하여 해군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해군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보고를 무시한 채 다음 날인 28일 어선의 음파탐지기에 탐지된 해경이 식별한 것과 동일한 위치에서의 보고를 받고 그제서야 출동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최소 69시간 이내에 함미를 찾아야 한다고 했던 당시 국방부의 입장과도 정면 배치되는 행동이었다. 당연히 언론들은 그 이유를 알고자 했으나, '''국방부에서는 해경이 해군 측에 함미좌표를 전달했다는 내용의 사실조차도 증명해 줄 수 없다고 했다.'''[* 이 때문에 천안함 유가족이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자신들과 똑같다고 말했다. 즉 천안함 사건은 북한의 침공 허용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국가 재난 대처도 보여주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세월호 사건을 다루면서 천안함 유가족을 만나서 이야기 하면서 나오는 이야기다. 천안함과 세월호는 직접적인 원인은 다르지만 간접적인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까지 본다면 꽤 유사하다.] 이는 두고두고 의혹거리가 되었다. [[http://news.kbs.co.kr/society/2010/04/05/2075052.html|링크]] [[해군 해난구조전대|해군 해난구조대]], [[해군 특수전전단|해군 UDT/SEAL]], [[육군특수전사령부|육군 특전사]] 및 [[중앙119구조본부|중앙 119 특수구조대]]의 잠수요원들도 수중 수색, 구조 작업에 투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